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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이 재호를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인가없는 한적한 산기슭에 자리잡은 외딴 집이었다. 다닥다닥 벽 하나씩을 두고 집들이 늘어서있는 후미진 동네에서, 홀로 멀찍이 떨어져 자리잡은 그 집 주변에는 가로등하나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먼 거리가 아님에도 같은 마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만큼 외져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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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의 집 안은, 그 집 주변만큼이나 텅 비어 깨끗했다. 이부자리와 작은 세발 옷걸이, 얼룩진 앉은뱅이 탁자, 대충 설거지되어있는 수저와 냄비, 그리고 거기에 끓여 먹었을 라면껍데기가 빼꼼히 삐져나와있는 쓰레기통. 그것이 전부였다. 침대, TV, 컴퓨터, 옷장, 그리고 심지어 냉장고도 없이,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이 참 깨끗하네요...하하"
"...."
세인이 재호의 눈치를 살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지만, 재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앉은뱅이 탁자를 방 한가운데로 옮겨놓고 앉으며, 손짓으로 세인에게 앉기를 권했다. 세인은 그 손짓에 따라 재호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드..안 벗으세요?"
집안에 들어와서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만큼 깊숙히 후드를 눌러쓰고있는 재호가 갑갑해보여서 꺼낸 말이었지만, 역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봐."
"...하아.."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그의 태도에 세인은 짧게 한숨을 짓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5살때 어머니가 검은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는데 사흘후에 돌아가셨고, 10살때는 보육원 선생님이 검은색으로 변하신 것을 보게 되었는데 역시 나흘후에 돌아가신 것. 그리고 오늘도 검은색 여자를 보았는데, 재호가 일주일내로 죽을 것이라고, 살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거기까지 설명한 세인은 잠시 말을 쉬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무당이셨고, 왜 검은색이냐고 물었을때 그게 무엇인지 아시는 것처럼 자신을 안으며 슬피 우셨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인은 그렇게 설명을 하는동안 마음이 점점 가벼워 지는것을 느꼈다. 믿어줄 사람이 없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혼자만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말을, 눈앞의 이 남자는 믿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물속에 잠겨있다가 비로소 천천히 물밖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그런 쾌감이었다.
재호는 세인의 말을 다 듣고는 후드를 꾸욱 누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군... 알겠다."
"...? 혹시 제가 보는 검은색이 뭔지 아시나요?"
재호의 중얼거림에 세인이 세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가 어떻게 검은색을 본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귀신의 '한'이 그렇게 보이는 듯 하군"
"에...?"
세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달리 짐작가는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귀신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재호는 그런 세인을 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귀신이 성불하지 못하고 이승에 남는 이유는 이승의 무언가에 '한'이 맺혔기 때문이지. 너는 그게 검은색으로 보이는 거고."
"아...음..."
세인은 재호의 설명을 어떻게든 납득했다. 재호가 짧게 물었다.
"설명이 됬나?"
"그럼 아저씨는 검은색을 보는게 아닌거 같은데...어떻게 그 여자분이 죽을 거라는걸 아신거죠?"
좀전 재호의 설명을 곱씹던 세인은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설명이 '자신은 검은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어떻게 귀신의 한이라는걸 보는것인지 물은 것이었으나, 재호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는 퇴마사니까"
"에...?"
"내 눈엔 귀신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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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사라면...귀신을 퇴치하는 사람?"
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재호가 이를 정정했다.
"퇴치라기 보다, 한을 풀어줘 성불을 도와주는 사람이지"
재호의 말투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오는 무심한 말투였으나, 그 내용은 세인으로 하여금 말투따위는 신경 저편으로 잊어버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을 풀어줘 성불을 도와준다'는 것은, '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곧 '검은색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아저씨는 그 한이라는 걸 풀어줄 수 있다는 말이군요??"
세인이 흥분한듯 엉덩이를 반쯤 떼며 물었다. 그 목소리는 몹시도 들떠있었다.
"뭐, 그렇지"
세인의 목소리가 어떻든, 재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세인의 심장을 격하게 뒤흔들었다.
항상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을 납덩이처럼 짓누르는 죄책감이 있었다. 검은색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줄곧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무력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사람에게 도와달라고, 검은색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하고 싶었다.-
"도...와...주세요..."
그녀는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황홀한 기쁨에 목이 매어온 탓이었다.
"...?"
세인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재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인은 기대감으로, 기쁨으로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힙겹게 억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큰소리로 말했다.
"학교가 검은색이에요...! 도와주세요...!"
세인은 그렇게 소리지드듯 가슴 깊숙한 곳에 매어두었던 말을 꺼내놓고는, 고개를 숙인채로 벅차오는 해방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 눈앞에,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도와줄 수 있어.'
'드디어 검은색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다.